personal journal

처절한 생존 본능

성실한번역가 2010. 1. 25. 17:22

녀석이 30~40일 무렵일 때 하도 보채서 정보나 찾아볼까 하고 육아카페를 기웃거렸는데, 그 때 대다수의 엄마들이 하는 말이 50일 넘어가면 아이가 사람 알아보고 눈 맞추고 웃게 되는데 그걸 보면 힘든 게 싹 가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설마설마했었는데, 음, 정말 녀석도 요즘은 눈만 마주쳤다 하면 활짝 웃는다. 그것도 아주 좋아 죽는다는 듯이 방실방실 웃으면서 몸도 뒤챈다. 그런 걸 보면 정말로 피곤이 눈 녹듯 사라지긴 한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이 녀석이 엄마나 아빠를 알아보고 웃는 것이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할머니가 들여다 보면 할머니를 보면서도 웃고, 도우미 아주머니가 얼러 주면 도우미 아주머니를 보면서도 웃는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사람의 형체를 한 것과 눈이 마주치면 일단 웃고 보는 것이다. 물론 그래도 정도의 차이는 있어서 엄마인 나를 보면서는 활짝활짝 웃는다면, 밤에나 잠깐씩 보는 아빠를 보면 어색한 웃음을 띤다. 뭐 그래도 아무튼 누굴 보던지 웃긴 웃는다.

 

이걸 보면서 세운 가설은, 이 무렵 아기들이 특별히 엄마나 아빠를 좋아해서 마주 보고 웃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살아남기 위한 생존본능으로 웃음을 짓는 게 아닐까 싶다. 그 나이쯤 되면 아기도 자기가 얼마나 귀찮은 존재인지 아는 거다. 먹이기도 힘들지, 재우는 건 더 힘들지,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가 말이다. 그러니까 제발 자기 귀찮다고 어디다 갖다 버리지 말고 끝까지 좀 키워 달라고 아무나 보고 활짝 웃는 기능을 터득한 것이다. 이건 마치 젖을 빠는 행위나 배설하는 행위처럼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에 의한 행위임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모든 아기들이 모든 사람들을 보고 방긋방긋 웃을 리가 없지 않은가.

 

보라, 녀석의 생존을 위한 저 처절한 몸부림을.

 

 

 

이렇게 웃는 녀석을 어디다 갖다 버릴 수 있으랴. 녀석의 염원대로 끝까지 거둬 키워 주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