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르 카레 vs. 엘러리 퀸
2학년 2학기 과목 중에 조금 긴 호흡으로 약 20 페이지 분량의 번역을 하는 과목이 있다. 오래 전부터 이 과목을 위해 어떤 작품을 번역할까 이것저것 생각을 했었더랬다. 그냥 막연히 고를 때는 굉장히 재미있었는데, 막상 결정을 해야 할 순간이 닥치니 이게 의외로 괴롭다. 누굴 고르고 누굴 접어 둬야 하는지, 생각 같아선 다 해 보고 싶은데 말이다. 심사숙고한 끝에 존 르 카레의 'Constant Gardener'와 엘러리 퀸의 'Cat of Many Tails'를 최종 선상에 올렸다. P.G. 우드하우스도 해 보고 싶었지만, 이 사람 책은 처음부터 새로 읽어야 해서 그냥 후보에 올려 둔 정도였고.
그저께 이 과목의 준비를 위한 미팅에서 선생님은, 자기가 즐겁게 번역할 수 있는 작품을 고르라고 조언하셨다. 아 그거야 물론이다. 고상하고 품격있는 문학 작품 같은 것은 고상한 다른 친구들이 해 줄 것이고, 나는 그저 내 급에 맞게 재미난 소설이나 번역하며 바쁘고 고된 2학기 생활의 한 줄기 활력소로 삼으리라고 생각하던 차다. 엘러리 퀸은 내가 번역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가 된 작가나 다름없어서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꼭 번역하겠다고 벼르고 있었고 (그리고 이런 류의 수업시간에 추리소설을 번역하는 학생은 아마 없지 않겠는가. 나름 추리소설의 위상을 높여주고 싶기도 해서), 존 르 카레는 너무 어렵게 읽어서 감히 손댈 마음이 나지 않지만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서 살짝 욕심이 났던 작가다. 그런데 선생님은 내 얘기를 들으시더니, 존 르 카레가 그렇게까지 어렵지는 않다고 하신다!!! 아니 물론 선생님이야 그러시겠지. 나는 그 사람 책을 읽는 데 무려 한 달이나 걸렸단 말이다. 그것도 어느 때는 하루에 한 페이지 겨우 넘기면서. 하지만 '좀 challenge한 정도지 손도 못 댈 정도는 아니다'라는 말씀을 들으니, 나의 저 밑바닥에 깔려 있던 도전의식이 갑자기 고개를 불쑥 든다. 게다가 에드거 앨런 포를 방금 끝낸 터라, 이제는 뭔들 못할 소냐 싶은 기분도 좀 들고.
그래서 다시 'Constant Gardener'를 읽어 보니, 어라 정말 예전만큼 그렇게 어렵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 작품을 읽었던 것이 2009년 초 대학원 입시를 막 끝내고 나서였으니, 지난 2년 간 또 나도 모르는 새 실력이 죄금 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한 며칠 읽어 보고 어떻게 한 번 덤벼 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런데 비교 차원에서 엘러리 퀸의 'Cat of many tails'를 읽어 보니, 이건 작품성, 번역, 난이도 이런 걸 다 떠나서, 엘러리 퀸에 대한 그 오랜 해묵은 애정이 뭉클뭉클 솟아 오르는 것이다. 이 사람을 내가 아니면 누가 보듬어 주랴 하는 숙명 같은 것도 느껴지고. 게다가 이 작품은, 어느 페이지를 펼쳐서 그냥 눈에 띄는 대로 아무 데서나 한 줄만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 훤히 안다. 20 페이지를 골라야 한다면 어느 부분을 골라야 하는 지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런 면에서 시간을 많이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엘러리 퀸을 존 르 카레 때문에 내려 놓기가 싫다.
정말로 책을 내는 것도 아니고, 그냥 20 페이지 짜리 과제물 내는 거 결정하면서 뭐 이런 고민까지 하고 앉았을까 싶은데... 배우는 입장에서 좀 도전적인 존 르 카레를 할 것이냐, 아니면 옛 연인을 만나는 기분으로 엘러리 퀸을 고를 것이냐 (그렇다고 엘러리 퀸이 쉽다는 건 아니다. 번역을 해야 한다면 상당한 양의 독일어 대사도 처리해야 한다....) 이런 상황이다. 정말로 막막해서 어제는 아들놈을 붙들고 '엄마 뭐 번역할까?' 물어도 봤지만, 늘 그렇듯 아들놈은 밥만 우걱우걱 먹을 뿐이다. 나도 아들놈처럼 좀 단순하게 살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