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rsonal journal

안녕, 정태원 선생님...

성실한번역가 2012. 1. 18. 23:08

오늘 출판사와 계약을 하러 잠깐 서울에 다녀 왔다. 담당 편집자와 얘기를 하던 도중 정태원 씨에 대한 얘기가 나왔는데, 그 분이 작년에 별세하셨다는 것이다. 아, 진짜... 그 말에 거짓말 안 보태고 눈물이 찔끔 나올 뻔 했다. 그 분 블로그에 안부글 남겼다가 그에 대한 댓글이 달린 것을 보고 환호를 했던 것이 불과 재작년 가을이었는데... 내 말을 들은 편집자는 그 당시에도 이미 암 투병 중이셨을 것이라고 한다. 꽤 오래 앓으셨다고. 그랬구나...

 

일면식도 없는 분이지만 무척이나 슬프다. 아직 돌아가실 때가 아닌데... 어떤 면에서 보자면 그 분은 내 롤모델과도 같은 분이다. 젊은 시절 광고 회사에 다니면서 출장을 나갈 때마다 미국 전역의 헌책방을 뒤지며 우리나라에서 구할 수 없는 추리소설을 사 모으다가, 결국은 회사를 그만 두고 추리소설 번역에 매진하며 이 분야에 일획을 그으신 분이다. 좋아하는 일을 추구하기 위해서라면 잘 다니던 회사도 때려칠 수 있다는 포부와 기개는 그 분에게서 배운 것이다. 추리소설은 대중적인 것 같지만 의외로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번역가들도 마찬가지여서, 애정을 가지고 추리소설을 성의 있게 번역해 주는 사람이 별로 없다. 개판 오분전인 추리소설들에 분통을 터뜨리던 시절, 믿고 살 수 있는 책을 만들어 주신 분은 단연 정태원 씨였다.

 

그 분 블로그에 남겼던 글이,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번역을 공부하게 된 학생이고 학교에서 내 준 한영 번역 숙제의 텍스트로 선생님이 쓰신 엘러리 퀸 해설을 골라서 번역하고 있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그 글에 정태원 선생님은 앞으로 우리나라에 좋은 책을 많이 소개하는 훌륭한 번역가가 되시라는 덕담을 남겨 주셨다. 그게 그 분과의 유일한 인연이 되었구나. 번역을 좀 더 하다 보면 미약하게나마 인연의 끈이 생기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했었는데. 아, 이 아쉬운 마음을 어쩔까.

 

(덧붙임: 아침에 그 분의 유작이 된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이라는 책을 주문했다. 이제 이런 흥미로운 앤솔로지들은 누가 만들어 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