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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한번역가 2014. 3. 17. 22:16

엘러리 퀸의 '열흘 간의 미스터리' vs '전자부품 대백과사전'

 

음.

 

이 두 출판사는 참 얄궂게도, 마치 짜기라도 한 듯 일을 꼭 같이 준다. 사실 발단은 그랬다. 전자부품 사전의 한빛미디어 쪽에서 12월 말에 번역 제의가 왔었는데, 당장 할 일도 없고 해서 일단 맡았다. 번역료가 좀 저렴한 곳이라 대신 일정을 아주 널널하게 잡는 것을 조건으로 해서 수락한 것이다. 그랬더니 한 달 후 기다렸다는 듯이 엘러리 퀸 책의 번역 의뢰가 들어왔다. 이걸 내가 어찌 거절하겠는가. 당연히 맡아야지. 그래서 두 권을 동시에 작업 중이다. 마감도 사이좋게 둘 다 6월 말이다.

 

사실 엘러리 퀸이랑 맞붙으면 어지간한 책이라도 밀리기 마련이다. 엘러리 퀸에 있어서는 나는 절대로 객관적이지 않다. 전자부품 사전도 책으로 봐서는 상당히 솔깃해 보였지만 번역 자체는 그냥 노가다에 가깝기 때문에, 정말이지 여건만 된다면 엘러리 퀸에 집중하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간 그렇게 널널한 일정에도 불구하고 마감이 위태로워지기 때문에...... 눈물을 머금고 하루를 이등분해서 한나절은 엘러리 퀸을, 나머지 한나절은 전자부품 사전을 번역하고 있다. 책을 두 권 동시에 번역하자니 널널한 일정 같은 것도 크게 의미가 없고, 6월까지는 그냥 분주히 달려야 한다.

 

그러다 뜻밖에 생각이 좀 바뀔만한 일이 생겼다. 전자부품 사전 작업을 하면서 자료가 필요해 참고서적이 될 만한 책을 좀 찾아 봤는데, 이런 류의 책이 전무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건 나로서도 좀 놀라운 일이었다. 업계에서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물론이거니와 실생활에서도 사용할 일이 은근히 많은 부품들인데(건전지, 스위치, 모터, 퓨즈, 전자석, 다이오드, LED, 뭐 이런 것들이다), 이런 부품들의 원리와 내부구조(내부구조란 회로 상의 기능을 말하는 게 아니라 정말, 진짜, 구조를 말한다. 모양이 어떻게 생겼고 크기가 얼마고 쪼개보면 안에 뭐가 들어 있고, 이런 것들)를 설명하고 정확한 사용법을 알려주는 책이 정말이지 단.한.권.도. 없다는 말이다. 책을 뒤지다 뒤지다 결국 찾게 되는 책들은 다 대학 초년생을 위한 개론서이거나 대학/대학원용 전공서적들이고, 엄청나게 어려운 말로 설명이 되어 있다. 이런 책들은 지금 내 번역 작업에 도움도 안 될 뿐더러 일반인에게는 접근 자체가 힘든 책이다. 혹시 내가 적당한 책을 못 찾았을 수도 있겠다마는, 내가 못 찾는데 일반인들이 찾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갑자기 지금 번역하는 이 책도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이한 우리말로 과학 기술을 번역하겠다는, 번역자로서 품었던 초심이 떠오른 것이다. 아, 아무튼...... 도서관에서 참고서적 찾다가 갑자기 불끈해서는.... 엘러리 퀸도 예전 번역 복원 작업 하면서 속으로 쌓인 말이 산더미인데. 일 끝나면 누구 동종업계 사람 하나 붙들고 고해성사를 좀 봐야겠다.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