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자를 읽을 줄은 알지만 쓸 줄은 모른다. 학교에서 배우기는 번체자를 배웠는데, 예전 중국에 출장다닐 때 보니 이미 알고 있는 한자와 비슷한 모양을 한 간자체도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었다. 읽을 때는 제법 술술 읽으면서 무슨 글자든 쓰려고 하면 쉬운 한자인데도 불구하고 도무지 손이 움직여지지 않고, 그럼에도 억지로 억지로 써 보면 결국 틀리게 쓰고 만다. 스스로 생각해도 참 특이한 재주다.
그런데 우리말 어휘에 대해서도 이와 비슷하게 알고 있다는 사실을 요즘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다.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것을 좋아했던 터라 어휘는 풍부하다고 자부했던 바다. 그런데 영어 원서를 읽다 보면, 글쓴이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는 잘 파악하면서도 이것을 우리말로 설명하자고 들면 똑 떨어지는 어휘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런 상황에 해당하는 어휘가 없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 다른 사람이 이를 매끄럽게 번역해 놓은 것을 보면 아하, 하고 무릎을 탁 치면서, 나도 알고 있었던 그 단어/표현이 왜 떠오르지 않았을까 싶어진다. 한 마디로 다른 사람이 적재적소에 잘 써 놓은 어휘는 잘 받아들이고 이해하면서 막상 내가 쓰려고 하면 도통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단순한 독자의 입장이었을 때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오히려 원서를 읽으면서 우리말을 거치지 않고 직접적으로 글의 내용이 전달되는 것이 훨씬 더 효율적이었더랬다. 그런데 이제 번역을 고민하는 입장이 되고 보니 우리말 어휘력을 늘리는 것이 당면과제가 되어 버렸다. 우리말은 모국어라서 상대적으로 소홀히 여기기 쉽지만 우리말도 언어이기 때문에 잘 쓰려면 훈련을 해야 한다.
번역일은 아직 시작도 안 했지만, 공부하면 할수록 우리말에 대해 점점 더 큰 책임을 느낀다. 한자야 남의 글이니까 그러려니 하더라도, 글을 가지고 밥 벌어 먹겠다고 나선 이상 우리말을 제대로 쓸 줄 알아야 고개 들고 살 수 있지 않겠는가. 모든 것이 다 그러하듯이 잘 모를 때는 만만해 보이다가 점점 발을 들여 넣을수록 막막함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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