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인 얘기를 조금 해 보자면, 이 <최후의 일격> 번역 의뢰가 왔을 때 도저히 받을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감사하게도 몇 군데에서 한꺼번에 들어온 일들이 차곡차곡 순서대로 줄을 서 있던 상황이라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거절을 했어야만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될 대로 되라 하는 심정으로 덥석 수락하고는, 이리저리 시간을 빼고 이 일을 이렇게 돌리고 저 일을 저렇게 넘기고 하면서 결국 번역을 끝냈다. 그 덕에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6개월째 (지금 이 순간까지도!) 눈 뜨고 숨 쉬는 동안에는 계속 번역만 하며 지내는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내가 이렇게 무리를 했던 건 이 작품이 엘러리 퀸의 작품이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엘러리 퀸 형제가 공식적으로 집필한 마지막 작품이니(이후의 작품들은 유령작가들이 썼다고 알려져 있다) 팬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놓칠 수가 없었다. 만만치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의 마지막 작품을 그것도 국내 최초로 번역했다는 영광을 생각하면 감수할 만한 고생이었다.
사실 나는 고전 미스터리, 이른바 본격 추리소설의 팬이다. 셜록 홈즈와 포와로를 섭렵한 후 처음 엘러리 퀸 월드에 입문한 것도 국명시리즈를 통해서였고, 젊고 패기만만한 엘러리 퀸과 노련하고 예리한 리처드 퀸 경감이 뛰어난 지능의 범인과 치밀한 두뇌 게임을 벌이는 국명시리즈의 활약상은 언제 펼쳐들어도 항상 가슴이 두근두근 거린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면서, 이 세상에는 진공 상태에서 벌어지는 게임 같은 범죄는 존재하지 않고, 인간의 마음속은 그보다 훨씬 더 복잡미묘하며, 탐정도 사람인지라 결코 전지전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자의반 타의반으로 알게 되었다. 이런 게 나이 먹는 비애인 걸까. 뭔가 순수의 시대로부터 등 떠밀려 쫓겨난 듯한 억울한 마음도 들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그 시절 추리소설에 대한 애정은 마음 한 구석에 고이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1957년의 엘러리 퀸이 고전 추리소설의 황금기였던 1929년을 회상하는 모습은 어딘가 모르게 애잔하다. 특히 사건의 답을 손에 쥐고서도 ‘도저히 그럴 수 없다’라고 단정 짓는 어리숙하고 젊은 엘러리와 세월의 풍파를 겪은 후 같은 답을 놓고 ‘그럴 수도 있겠더라’라고 깨닫는 중년의 엘러리를 근 3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대비시킨 것은 책을 덮고도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명장면이었다. 제한된 공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과 제한된 수의 용의자, 사건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고조되는 긴장감은 철저하게 고전 미스터리의 문법을 따르고 있지만, 사람들을 모아놓고 의기양양하게 범인의 정체를 밝히는 대신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쓸쓸히 인정하는 엘러리 퀸의 모습에서 저물어가는 한 시대를 받아들이는 작가 엘러리 퀸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러나 이제 고전으로 남은 그의 작품들은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있을 것이며,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 역시 앞으로도 항상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이 큰 위안이 된다. 이후에도 몇 권의 작품이 더 출간될 예정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한 시리즈를 마무리하자니 무언가 큰 매듭을 하나 지은 듯한 기분이 든다. 아마 엘러리 퀸 컬렉션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많은 분들도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시리라 생각한다. 작가로서 멋지게 ‘최후의 일격’을 날려준 엘러리 퀸에게 무한한 애정과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좋았던 그 시절, 전성기의 젊은 엘러리 퀸을 그리워하는 분들과 이 좋은 선물을 함께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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