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하는 내내 어렵다는 생각 밖에 안 했는데, 후기를 쓰라 하니 또 써지네.
그래도 2, 3권 후기/해설은 전문가께 의뢰하기로 했다. 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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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보니 우연히 제안을 받아 번역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 즐겨 읽던, 지금은 제목도 가물가물한 전 세계 명탐정들을 총망라해놓은 백과사전 유의 책에서 얼핏 본 탐정 이름 말고는 작가나 작품에 대한 사전정보도 없었다. 단편 8편이니 넉넉잡고 두어 달이면 끝낼 수 있으리라 야심찬 계획도 세웠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번역 작업은 무려 반년이 넘도록 끝날 줄을 몰랐고, 지금까지 번역했던 책 중에서 가장 어렵고 가장 오랜 기간을 잡아먹은 작품이 되었다.
영어가 어렵다 어렵다 어쩌면 그렇게 어려울 수가 있는지. 물론 역자의 실력이 부족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겠지만, 20세기 초 영국 작가의 고풍스러운 영어 문장은 단어 하나를 해석하는 데에도 며칠씩이나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야 했다. 줄거리라도 단순하면 모르겠는데, 이 작가는 마지막에 속 시원히 사건을 설명해주지도 않는다. 어떤 작품에서는 앞뒤 사정을 이해하기 위해 종이와 연필을 꺼내 시간 순으로 도표를 그려 정리해야 했고, 편집자와 여러 차례 피드백을 주고받고 나서야 간신히 줄거리가 꿰어 맞춰진 적도 있다.
그저 괴롭기만 하던 시간이 흘러 점점 원고의 형태가 갖춰가면서 이야기의 깊이가 느껴졌고, 생동감 넘치고 매력적인 주인공 탐정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그려지면서 고행은 점차 즐거움으로 변했다. 후련한 설명이 없는 대신 이야기에 담긴 속 깊은 의미를 오래도록 곱씹게 되고, 영국 문학 특유의 은근한 유머에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마지막 단편을 번역하면서는 급기야 주인공 캐러도스에게 반해 눈에서 하트를 쏘아대며 혼자 환호성을 지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앞 못 보는 탐정이 그런 멋진 액션까지 소화할 줄 그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사실 20세기 초 추리소설의 황금기에 세상에 나온 작품들 중에는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한 훌륭한 작품이 많지만, 국내에서는 몇몇 유명 작가의 작품 외에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고전은 어렵다는 인식 때문에 독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지 못하는 부분도 있겠고, 출판업계가 전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대중의 관심이 많이 미치지 않는 작품을 책으로 내기에 현실적인 제약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즐기는 다양한 유형의 추리소설과 스릴러의 근간은 20세기 초 황금기의 추리소설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를 조명하는 작업은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런저런 복잡한 얘기는 다 접어두고 오로지 재미 측면에서만 보더라도 이 시기의 작품들은 현대물과는 다른, 고전만이 줄 수 있는 묵직한 재미가 있다. 이 <맹인탐정 맥스 캐러도스>도 세상에 나온 지 거의 100년이 지났지만, 지금 읽어도 정말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번역을 끝내고 묻혀 있던 수작을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했다는 뿌듯함과 함께, 내가 무언가 좋은 일을 했구나 하는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역자로서도 흔치 않은 경험이었다. 미스터리 팬의 한 사람으로서 이 시대의 수작들이 앞으로 더 많이 소개되었으면 좋겠다.
이 작품의 최초 기획자이며 편집을 도와주신 YES24의 윤영천 팀장님과 종이책으로 내주신 박광운 대표님, 그리고 정말로 필요한 순간에 요긴한 도움을 주신 오랜 벗이자 동료 황은희 님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이분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이 작업을 무사히 마칠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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